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S. 패튼 (문단 편집) ==== 서부전선 ==== >"그럼 우리가 저 다리(레마겐의 철교)를 폭파해버리기라도 해야겠군." >---- >― 레마겐의 철교를 주워먹은 후, 라인 강 도하작전을 망친다고 영국군이 항의하자 한 말 이후 유럽 전선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후속 부대인 육군 제3군을 이끌고 참가해, '코브라 작전'을 발동시켜 눈앞의 몽고메리 부대에 정신이 팔려 있던 [[독일군]]의 뒤통수를 박살내 패주하게 만들고 중부 프랑스를 쾌진격하며 유럽 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친다. 패튼이 보직해임되어 있는 동안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묶여서 소모만 가중되는 중이라 패튼을 복직시킨 것이다. 영화에도 잘 나와있듯이 패튼과 그의 부하들은 폭주기관차마냥 가는 곳마다 독일군을 격파하면서 질주했는데,[* 이 문서에도 후에 언급되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소련 장군 주코프가 우리 "IS-3 전차는 저 멀리서 적을 안전하게 격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패튼이 "내 부하들이 그렇게 비겁하게 싸운다면, 전 그 부하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한걸 보면 개같기로 유명한 패튼의 성질머리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주코프도 만만찮게 개같은 성질머리의 보유자여서 둘이 주먹다짐까지 갈 뻔했다.] 보급부대가 못따라가서 아이젠하워 사령관 명의로 특별수송대까지 조직했는데도 부족했을 정도다. 패튼은''' '우리가 빠른 게 아니라 너네가 느린 것'이라고 취급했다.''' 이것은 패튼이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고속 기동전의 신봉자여서인데, 선두에 서서 달리는 기갑부대와 정찰대는 적의 어려운 저항에 마주치면 그대로 우회로를 찾아 원래 목표로 계속 달려나가고 뒤따라오는 [[보병]]과 [[포병]]이 아까의 그 적군과 싸운다. 이런 식으로 틈새를 찾아 계속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적군은 더이상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패튼의 기갑부대가 자기네 영역으로 들어와 전선을 붕괴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다만 후속부대들은 패튼이 남겨놓고 우회해버린 적군들을 하나하나 쳐부숴야 했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보급선이 연합군의 역량 밖으로 늘어나는 문제도 있었다. 결국에는 보급 문제로 1944년 여름에 진격을 멈추게 된다.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시도했던 게 다름아닌 [[마켓 가든 작전]]. 이를 두고 히스토리채널에서는 몽고메리가 떼를 써서 패튼의 보급을 가로쳤다고 표현한다. 이는 말로는 쉬워보이지만 실제 사용 조건은 까다로운 전술이다. 일단 상대가 전선에서 병력을 빼서 아군 기갑전력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전선에 압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기병과 마찬가지로 기갑전력이 충격력을 잃으면 적진 한가운데서 포위되게 되므로 충분한 보급과 휴식, 그리고 예비전력이 필요하다. 또한 우회한 적군을 보병과 포병이 무너뜨리지 못하면 보급로가 위협받는다. 한편 패튼은 [[야전군사령관]]이면서도 끊임없이 전선시찰을 나가고,[* 애용하던 전용 지휘 차량은 전선 근처를 돌아다니기에 일단은 방탄판 등을 덧붙였다. 한편 만약 무장이 없다면 꼭 자기가 직접 쏠 수 있는 자리에 기관총을 개조해서 달았다. 근데 조용히 적을 피해 다니긴 글렀던 것이 항상 큼지막하게 빨간/흰색 조합 장성판을 상시 붙이고 다녔기 때문이다.] 전선 근처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올라오는 정보 보고는 꼼꼼하게 살폈다. 닥돌도 포지션과 타이밍 싸움이기 때문에 정보 분석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편이었다. 그저 적이 보인다고 무조건 닥돌하는 닥돌 바보는 아니었는데 오히려 전선의 틈새, 즉 적이 없는 헛점을 찾기 위해서 부지런히 전선시찰을 한 것에 가깝다. 일례로 밑에 설명될 아르덴 공세 때도 오히려 브래들리 장군보다 독일군의 이상징후를 먼저 파악하고 어느 정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해 두었다. 그러나 그 독불장군 같은 성품 덕분에 여전히 상관과 동료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바닥을 달렸는데, 특히 [[영국군]] 지휘관이자 롬멜 장군을 몰아낸 [[버나드 로 몽고메리]] 영국 육군 원수와는 [[개]]와 [[고양이]] 사이였다고 한다. 안 그래도 몽고메리도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해서 미군 장성들에게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기에, 어찌 보면 동족 혐오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작전에서 몽고메리가 "패튼이 어느 독일군 장교의 군대를 제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듣고 "내가 그 독일놈 모가지를 뽑아서 몽고메리 [[똥|X]]구멍에 쑤셔버릴 테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 그래서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이런 시나리오가 자주 펼쳐졌다고 한다. >1.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소집한다. >2. 전략을 토의한다. >3. 패튼과 몽고메리가 서로 내가 옳네 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4. 곧 두 사람끼리 언성을 높이면서 말싸움을 벌이고, 나머지 지휘관들은 할 말을 잃는다. >5. 회의가 끝난 후 아이젠하워 원수가 [[뒷목잡기|뒷머리를 부여잡는다.]] >6. 브래들리 장군이 패튼 장군과 몽고메리 원수를 달래러 간다. >1. 다시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이하 반복. 1944년 8월 31일 보급을 위해 프랑스 메츠에서 기동을 멈추었고 그 사이 요새를 강화한 메츠의 독일군과 10~11월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11월 23일 메츠를 점령했다.[* 패튼이 기동전에만 능하고 공성전이나 시가전 등에는 젬병이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공군과 미사일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한 지금도 민간인을 고려할 경우 무척 고단하고 긴 시간이 소모되는 게 시가전이다. 겨우 1개월 남짓 두터운 요새지구인 메츠에 고착되었다고 해서 요새공략전에 무능했다고 볼 순 없다. 당장 훌륭한 전술가로 평가받는 롬멜도 토브룩 공략에 여러 차례 실패를 겪었고, 몽고메리는 작전 준비에 몇 달을 잡아먹은 적이 여러 차례 있다.][* 또한 군사학을 따로 배우지 않았더라도 직관적으로도 지형지물과 엄폐물이 많은 시가지에서 전투하려면 정말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되고 그만큼 골머리를 앓아야한다는 느낌이 올 것이다. 특히 이미 점령되어 적군이 주둔한 도시에다가 덩치도 큰 전차를 집어넣어 운용해야하니 정말 신중하게 작전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 1944년 12월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를 맞이해서 반격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때 단 48시간 만에 서쪽으로 진격 중이던 미 제3군예하 3개 사단으로 구성한 1개 군단을 뽑아내어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초월적인 기동을 보였다. 즉 독일의 공세를 예측하고 반격계획을 미리 짜두었다는 의미. 패튼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단순한 닥돌 바보가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 반면 브래들리와 그 참모들은 독일의 반격에 대한 대비책을 충분히 세워두지 못했다. 당시 뫼즈 강 인근까지 진격했던 독일 기갑대장 만토이펠과의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한 일전에서 큰 타격을 입히며 승리를 거두면서 독일의 공세를 제대로 꺾어버리는 성과를 내는데 성공했고 이후 아르덴 대공세의 여파로 서부전선 독일군이 약해지자 3월 23일에 당시 연합군의 골칫거리였던 지크프리트 라인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이 당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 반격 작전을 진행할 당시 악천후로 인해 진격이 지지부진하고 항공 지원도 원활하지 않자, 패튼은 갑갑한 마음에 제3군의 수석 군종 목사에게 기도문을 작성하라고 명했다. 기도문의 내용은 '전쟁을 위해서 눈과 비가 그치고 쾌청한 날씨를 주시기를' 기원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기도문을 작성한 후 다음날인 12월 23일, 정말로 날씨가 맑아졌다고.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에서도 묘사된 실화이다. 그 이후에는 독일 국내로 진격, 연합군 최초로 라인 강을 자력으로 건너버린다. 당시 몽고메리와 아이젠하워간에 라인 강 도하는 영국군이 먼저 하기로 합의되어 있었지만, 미군이 먼저 그 유명한 '레마겐의 철교'인 루덴도르프 교를 장악해버렸고, 미군이 몰려오자 독일 육군 [[공병]]들이 뒤늦게 폭파했는데 폭약량을 잘못 계산해서 부서지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지만 먼저 건넌 후에 벌어진 일이라 상대적으로 묻혔어도 독자적으로 도강작전을 진행해서 기습적으로 라인 강 건너편을 제압한 후, 부교까지 설치한 것이라 전술적 의미에서는 더 가치가 높다. 이건 [[http://www.scrapbookpages.com/EasternGermany/Buchenwald/GeneralPatton.html|라인 강에 오줌 싸면서 인증샷도 찍었다.]][* 이 상황은 1969년 영화 ''레마겐의 철교''의 후반부에 잘 나와있다.] 대대적으로 작전 계획을 짠 뒤 한참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폭격, 포격을 날리며 부산떨던 몽고메리는 멍때려야 했다.[* 몽고메리는 보병 출신이라 신속한 기동이라든지 기갑전술에 거의 무지했다는 평가와 더불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보였다시피 계속된 물자, 병력 지원으로 자신에게 확실히 유리한 상황일 때 돌격하는 면이 있었다. 반대로 패튼의 경우에는 정석적인 기갑지휘관으로서 신속한 기동과 돌파에 매우 뛰어난데다 성향 자체도 철저하게 틈을 본 뒤 그대로 돌격하는 전술을 선호했기에, 기존 본인의 병과와 성향까지 패튼이 유리한 조건이었던 셈.] 전쟁 후 대선주자 자리를 노리던 아이젠하워는 미군 희생이 늘까봐 노심초사했고... 1945년 4월 14일 [[대장(계급)|대장]]으로 진급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b8527939e7931f354fb3194002d9bbbd.jpg]] 대장 진급 후의 사진. 철모에 달린 계급장을 보면 대장용 계급장을 새로 붙이지 않고 기존의 중장 계급장 위에 별 하나를 덧붙여 사진의 형태로 만들었다. 유럽 전선에서 이긴 패튼은 이제 중국으로 보내져서 이번엔 일본군과 싸울 차례였지만 일본이 항복하면서 중국행은 취소되었고, 독일에 남게 되었다. 이후 그는 독일 바이에른 지역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되지만, 정치적으로는 처신이 워낙 무뎌 결국 힘든 시기를 보낸 듯하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10군 사령관 사이먼 버크너 중장이 전사하자 그 자리로 가기 위해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맥아더의 측근과 접촉했는데 부정적인 의견을 듣고 포기했으며, 결국 맥아더의 육사동기인 스틸웰이 임명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